[시사의창=이태헌 기자] 진정한 풀뿌리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주민자치회 법제화 논의가 한창인 가운데,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법안이 주민자치의 핵심인 '주민'과 '자치'를 모두 놓치고 있다는 날 선 비판이 제기됐다.

사단법인 한국주민자치학회(회장 전상직)는 최근 국회 행정안전위원장이 제안한 ‘지방자치법 일부개정 법률안(대안)’에 대해 "주민자치법으로서의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을 모두 결여하고 있다"는 내용을 담은 강력한 의견서를 제출했다.

학회 측은 이번 개정안이 12년에 걸친 시범실시의 오류를 바로잡기는커녕, 주민자치를 행정의 하부 구조로 고착화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 "주민 없는 자치회, 시민단체 하청 기구로 전락"

학회는 의견서를 통해 지난 2013년부터 12년간 1,400여 개 읍면동에서 진행된 시범실시가 사실상 실패했음을 꼬집었다.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된 것은 '회원 없는 주민자치회'다. 주민들이 회원이 되어 권리와 의무를 갖는 구조가 아니라, 소수의 위원만으로 구성되다 보니 대다수 주민에게 외면받았다는 것이다.

한국주민자치학회는 "주민의 참가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해 활동이 저조할 수밖에 없었다"며 "설립과 운영을 시민단체에 위탁함으로써 시민운동가들이 주민자치회를 지배하는 기형적인 구조를 낳았다"고 비판했다.

■ 읍면동 구역의 한계… "친밀성 없는 거대 조직은 자치 불가능"

주민자치회의 구역 설정에 대한 문제 제기도 이어졌다. 현재처럼 읍면동 단위로 자치 구역을 강제할 경우, 인구가 너무 많아 주민 간의 친밀성 형성이 어렵다는 지적이다.

학회 측은 "주민자치는 주민들의 친밀성을 바탕으로 공동과 공공으로 나아가는 것"이라며 "이미 읍면동장이 행정 기관으로 상주하는 구역에서 주민자치회는 읍면동장을 보조하는 역할 외에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고 분석했다. 즉, 관료 행정이 닿지 않는 생활 현장에서 주민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적정 규모의 자치 단위'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 "조선 촌계·향회조규의 민주적 전통 계승해야"

의견서는 현재 국회 계류 중인 법안을 "주민에게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지 않고 일만 강제하는 불량 법안"이라고 규정하며, 우리나라의 역사적 자치 전통에서 해법을 찾을 것을 제안했다.

과거 관료나 양반이 독점했던 '향약'은 실패했지만, 주민들이 생활 세계에서 상부상조하며 만든 '촌계'는 훌륭하게 기능했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또한 1895년 반포된 '향회조규'가 민주적 선거로 대표를 선출하는 등 선진적이었으나 일제 강점으로 무산된 역사를 언급하며, 이러한 전통을 현대적으로 계승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상직 한국주민자치학회장은 "아직도 우리 근린 자치는 관료가 독점하는 구조를 벗어나지 못했다"면서 "12년간의 시범실시 경험과 선진국 사례, 조선의 촌계 전통을 면밀히 검토해 주민들이 스스로 자치회를 만들고 운영할 수 있는 '품위 있는 법안'을 만들어 달라"고 국회에 간곡히 호소했다.

이번 의견서는 단순한 법안 수정을 넘어, 주민자치회가 행정의 들러리가 아닌 주민 생활의 중심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는 본질적인 화두를 던진 것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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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헌 경남취재본부장 arim123@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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