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민 국가유산청장이 7일 서울 종묘에서 종묘 앞 개발 규제 완화 관련 대법원 판결에 대한 입장 발표 기자회견을 하던 중 항의하러 온 세운 4구역 주민들과 대화를 하고 있다./연합뉴스
[시사의창=정용일 기자] 서울 종로 한복판, 고요히 자리한 조선의 영혼 ‘종묘’가 다시 정치와 도시개발의 한가운데로 끌려 나왔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종묘 인근 세운4구역의 재개발 사업을 둘러싸고, 정부와 서울시, 여야 정치권, 그리고 시민사회가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고층 건물이 들어서는 도시의 욕망과 수백 년 전 왕조의 흔적을 지키려는 가치가 부딪히며, 서울의 정체성과 미래에 대한 논쟁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
이번 갈등의 발단은 서울시가 추진 중인 세운4구역 재개발 계획이다. 이 구역은 종묘 바로 맞은편, 전통과 현대가 교차하는 도심의 요충지다. 서울시는 지난 8월 종묘 주변의 건축물 높이 제한을 완화하고, 최고 140m 수준의 고층 빌딩 건립을 허용하는 고시를 발표했다. 이 결정은 오세훈 시장이 주도한 도시계획 규제 완화 정책의 핵심 사례로 꼽힌다.
하지만 문제는 ‘절차’와 ‘상징성’이었다. 서울시가 국가유산청과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도시계획 변경을 강행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문화재 보존 당국이 반발했고, 유네스코의 ‘세계유산 영향평가 미이행’ 지적 가능성까지 제기됐다. 종묘는 단순한 고건축물이 아니라, 조선 왕조의 제례문화와 건축정신이 응축된 세계유산이다. 이곳의 시각적 조망과 주변 경관은 유산 가치의 일부로 평가된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이 논쟁은 정쟁으로 번졌다.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오 시장의 행보를 “정치적 의도에 따른 위험한 도시 실험”으로 규정했다. 이기헌 의원은 “종묘의 경관은 국가의 유산이자 인류의 자산인데, 지방선거를 앞둔 정치적 욕심으로 훼손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조계원 의원은 “오 시장이 재개발을 명분으로 종묘를 선거 도구로 삼고 있다”며 “정책 실패를 덮기 위한 정치적 퍼포먼스”라고 비판했다.
반면 국민의힘은 “서울시의 결정은 대법원 판결에 근거한 정당한 행정”이라며 맞섰다. 지난 6일 대법원은 “서울시의 개발 규제 완화 조례가 상위법에 위반되지 않는다”며 서울시의 손을 들어줬다. 국민의힘 김승수 의원은 “대법원이 법리적으로 명확히 판단했는데 문체부 장관이 ‘모든 수단을 강구해 막겠다’는 식으로 발언한 것은 월권”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총리와 장관이 정치적 계산으로 재개발을 막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선거용 행정”이라고 주장했다.
논쟁의 불길은 중앙정부까지 번졌다. 김민석 국무총리는 최근 “종묘 앞 초고층 건물이 세워지면 ‘턱’ 막히는 듯 답답하다. 이는 함부로 결정할 사안이 아니다”라고 발언했다. 이를 두고 야권에서는 “총리가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서울시장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행보를 보인다”는 해석이 나왔다. 문화체육관광부 최휘영 장관 역시 “문화유산은 후세에 물려줘야 할 국가의 책무”라며 종묘 보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그는 “종묘는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한국인의 정신적 근간”이라며 “이 사안을 정치로만 해석하는 것은 유감”이라고 말했다.
한편 세운4구역 토지주들은 “수년째 멈춰선 개발로 인한 피해가 막심하다”며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이들은 “우리는 문화유산을 파괴하려는 게 아니라 도시의 낙후된 환경을 개선하려는 것”이라며 “서울시는 법적 절차를 따랐고, 세계유산 보존과 재개발은 병행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다시세운광장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는 “주민의 재산권이 정치 논쟁에 희생되고 있다”는 목소리도 터져 나왔다.
국가유산청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종묘 인근 세운4구역 재개발 사업에 문제를 제기한 데 대해 이 일대 토지주들이 11일 서울 종로구 다시세운광장 앞에서 기자회견을 마친 뒤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처럼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진 갈등은 단순한 재개발 논란을 넘어선다. 도시가 ‘역사’ 위에 서야 하는지, 아니면 ‘미래’를 향해 달려야 하는지라는 근본적 질문이 깔려 있다. 세계유산으로서 종묘가 가지는 상징성과, 글로벌 도시 서울의 성장 전략이 충돌하는 현장은 한국형 도시계획의 한계를 보여준다.
전문가들은 “서울은 이미 성장의 한계에 다다른 도시”라며 “유산 보존과 개발이 이분법적으로 맞서지 않고,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모델을 제시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실제로 유럽 주요 도시는 고도 제한과 시각적 조망선을 엄격히 관리하면서도, 혁신적 도시공간을 구축해왔다. 반면 한국의 도시계획은 여전히 ‘속도’와 ‘효율’ 중심의 행정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세운4구역 재개발 논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법적으로는 서울시의 손을 들어준 대법원 판결이 존재하지만, 사회적 합의는 멀기만 하다.
정용일 기자 citypres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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