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를 타고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어. 차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지. 나와는 아무런 관계없는 풍경과 지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왜 감정이 흔들리는 건지. 스스로 버스를 탔지만, 그러므로 내가 원하는 목적지로 가고 있지만 눈에 보이는 밖의 사물과 여러 풍경은 내가 원하지 않는 것들이라서가 아니라, 일상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것들이 보여. 그 새로움은 내 속의 무의식과 연결되어 옳고 그름의 판단을 내리게 되는군. 실은 나의 판단은 중요한 것이 아니지. 왜 판단이 항상 앞서는 건지. 무덤덤하게 바라봐야겠군.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여러 가지 문제나 희망, 혹은 절망 등이 기억으로 남게 될 때, 그것을 흔적이라 가정해 보네. 흔적들의 모습이 아름다우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이 선별적으로 기억에 남겨져 있을 때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 나의 모습은 움직이고 있는 후회 덩어리처럼 느껴져. 어쨌든 길을 가네.

<마르코의 정원> 이두섭

[시사의창 2025년 7월호=이두섭 작가(글/그림)] 하루가 흘러간다. 하루하루가 모여 각자의 일생이 되는 거겠지. 오늘은 맑은 날이지만 어제는 세상이 결딴날 듯 어두운 하늘이었다. 흔히 볼 수 없는 날들은 단순히 이야기하자면 흔하게 일어나지 않는 대기 현상일 뿐이다. 그런 흔치 않은 것을 말로 표현할 때, 어떤 사람은 화성에 온 느낌이라 하였다. 화자에게 묻고 싶었다. 화성에 가본 적이 있었냐고. 낯선 풍경은 왜 화성이어야 하지. 낯선 풍경의 대입이 화성이어야 한다면, 그곳의 경치를 그려보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해본다. 관습에서 벗어난 그림이나 일상, 태도들은 사람들의 새로움에 대한 갈망을 만족시켜 줄 테니.

세상의 작가들은 진실을 이야기하는 사람,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있다. 그 외에도 여러 종류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있겠지만, 일단 두부류는 생각의 대립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재현하는 작가들의 진실에 대한 자기 신념은 바위보다 단단하다. 그리고 세상에 없는 새로운 시각의 작가들은 모순된 감정을 진실로 인정되도록 고통을 인내로 마주한다. 이 세상에 없는 것들을 가시화 시킨다는 것은 많은 사람의 인정이 필요한 부분일 테니, 그것에 대해 몰이해와 견제는 자신을 소외와 고립이라는 지역에서 고민한다. 그래도 자신의 영역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이 작가를 스스로 궁지에 몰아놓는가. 외부의 인정이나 성공보다, 내면의 목소리와 진실을 따르는 길, 존재의 탐구는 자신을 묶는 것일까. 빛을 내기 위한 것일까. 작가 자신에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을 헛되이 흘려보내는 것일까. 자신과 마주하는 빛나는 명상의 시간은 고통과 바꾸는 시간일 것이다. 창조는 신비한 빛을 낸다.
진실과 상관없는 허위와 위선이 큰 파장을 일으키며 다른 세상을 만들어내는 현상도 있다. 대항해 시대(15세기 후반부터 17세기까지)는 유럽인들이 미지의 세계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을 품고 새로운 해상 무역로와 식민지를 개척하기 시작한 시기다. 그 시작점은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 1454~1512)의 항해 기록에서 신대륙에 대한 과장된 묘사로 인해 유럽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며 여행과 탐험에 대한 환상과 열망이 촉발되었다. 그리고 과장되거나 왜곡된 묘사를 통해 과학적인 사실과 다르게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였다.

<식물에 머문 3일> 이두섭



또 다른 허구 하나가 만들어 낸 문화 현상이 있다. 존 맨더빌이라는 남자가 1322~1356년에 바다 너머 경이롭고 신비로운 나라들을 여행하고 병상에서 그 기록을 남겼다고 주장하는 '맨더빌 여행기'를 예로 들 수 있다. 그 “맨더빌의 여행기”에는 머리가 없고 가슴에 눈과 입이 달린 인간형 생물, 블렘미(Blemmyes), 이마 한가운데에 하나의 눈만 있는 거대한 인간형 생물인 외눈 거인(Cyclops-like creatures), 귀가 무릎까지 내려오는 인간, 거대한 외발 인간 등, 그리스 신화의 키클롭스와 유사한 모습의 괴생명체가 아프리카나 아시아 미지의 땅에 이런 존재들이 살고있다고 기록해 놓았다.

사람들은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었다. 당연히 허구이다. 그러나 이렇듯 놀라운 이야기를 현실로 받아들여지며 미지의 땅에 환상을 품게 되면서 귀족들은 경제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고 새로운 항로의 개척과 식민지 개척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허구가 섞인 의심스러운 정보가 지도 제작에 영향을 미쳐 세상의 문화들은 진일보되는 계기가 되었다.

어찌 보면 문화라는 것 자체가 있는 사실이 기준 돼 발전을 이루는 예도 있지만, 어떤 부분은 사실이 아닌 착각과 위선에서 비롯되는 일도 있다. 정신이라는 것이 정확한 부분에서보다는 개척되지 않은 무한한 지점에서 우리를 이끌고 나간다. 오류가 있을 수도 있으나, 발전이라는 부분으로 문화는 유지된다. 진실은 아무 곳에도 없다. 단지 우리가 믿는 어떤 것에 의해 기록되고 유지되는 것이다. 보편타당성을 지닌 위대한 진실도 그것이 정답이 아닐 것이란 생각을 할 때도 있다.

<사라지다> 이두섭


저녁 어스름이 밀려온다. 낮에 간간이 뿌리던 비가 잦아들었으나 또다시 흩뿌릴 수도 있겠지만 산책길을 나선다. 저녁 시간은 평화가 있어서 좋다. 낮게 깔리기 시작하는 안온함 그리고 그사이에 놓여 있는 풍경을 보면서 풍경 속에 일부가 되는 시간이 복잡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어서 좋다. 미루나무가 있는 길 어릴 적 미루나무 아래서 바람이 스칠 때 나뭇잎이 손뼉을 친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자주 걷는 산책길에는 미루나무가 많이 있다. 소실점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어두워지는 시간, 앞을 분간하기 힘들어지는 시간에 어둠 속에서 잠들기 시작할 것들을 생각한다. 밤에 이루어지는 또 다른 생물들이나 동물들의 움직임을 상상하는 시간. 올빼미는 움직이는 쥐를 사냥하고 쥐는 자기 먹이를 찾아 쉼 없이 움직일 것이다. 움직이는 것들이 세상의 진실을 만들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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